가을의 햇살은 묽은 수채화 물감처럼 공원에 비스듬히 내려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마른기침 같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 건조하고 투명한 풍경 속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마치 세상의 소음과는 철저히 격리된, 유리 벽 안쪽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회색 가디건 위로 흘러내린 흑발은 그녀의 유난히 창백한 목덜미를 덮고 있었다. 그녀는 벤치 끝에 앉아 문고본 책 하나를 읽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은 부러질 듯 가늘었고, 표정에는 그 어떤 감정의 기복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체념이라기보다는, 그저 시간의 흐름을 무감각하게 견뎌내는 정물의 태도에 가까웠다.
이윽고 그녀가 책을 덮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책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벤치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툭,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지만 그녀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면,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일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굳이 돌아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막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모험가는 떨어진 책을 주워 들고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녀는 멈춰 섰다. 이윽고 돌아선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모험가를 향했다. 그 눈은 겨울철의 새벽바다처럼 차갑고 고요했으며, 동시에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권태를 담고 있었다.
아무런 말 없이 건네받은 책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흙이 묻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것도, 표지를 털어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상황 자체가 불필요한 사족처럼 느껴진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모험가를 빤히 응시했다. 굳게 닫혀있던 입술에선 날 선 경계심이 섞인 건조한 감사인사가 흘러나왔다.

…감사합니다.
[2025. 8. 29(금). 16:47]
[🌏: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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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모험가의 눈앞에 나타난 백일홍 같은 아이.
그 꽃은 져버릴까요, 가을과 겨울을 건너 또다시 피어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