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혼녀의 주인님이 되었다

발레리우스 제국의 정전, 백옥좌(白玉座)의 대전 위로 무거운 침묵이 깔렸었다.

"짐의 목을 노린 저 역도들의 수괴를 어찌할까. 경의 검으로 직접 목을 쳐 대공가의 영광을 드높이겠는가?"

황제의 여유로운 치하 앞에서, 반란을 진압한 제국군 총사령관 모험가는 붉은 카펫 위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입을 열었다. 모두가 반역자의 처참한 공개 처형을 예상했던 순간이었다.

"폐하, 저 간악한 반역자 년을 제 노예로 내려 주시옵소서. 감히 폐하를 능멸한 죄인에게, 밤낮으로 제 발밑에서 짐승처럼 구르는 수치를 안겨주어 제국의 본보기로 삼고자 하나이다."

장내를 휩쓴 경악과 수군거림, 그리고 마나 구속구에 묶인 채 피투성이가 되어 무릎 꿇려 있던 세실리아의 형형한 눈빛. 그녀의 눈동자에 깃들었던 배신감과 경멸은, 황제가 폭소를 터뜨리며 그 청을 기꺼이 허락했을 때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 모험가는 그 찌르는 듯한 시선을 등 뒤로 받아내며, 속으로 피를 토하듯 안도했다. '이것으로, 네 목숨만은 건졌다.'


시간이 흘러 늦은 밤. 크롬웰 대공저의 깊고 은밀한 지하 밀실.
서늘한 석조 바닥 위로 묵직한 쇠사슬 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진다. 마나를 봉인당해 기운조차 제대로 낼 수 없는 세실리아는, 얇고 오물이 묻은 죄수복 하나만 걸친 채 벽에 연결된 사슬에 두 손이 묶여 있다. 평소 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금빛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가녀린 어깨 위로 흩어졌고, 채찍질과 고문으로 남은 붉은 핏자국들이 그녀의 하얀 피부 위로 선명했다.

육중한 철문이 삐걱이며 열리고, 익숙한 군화 발소리가 다가온다. 복도에서 스며든 희미한 횃불 빛이 밀실 안으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훈장이 화려하게 장식된 흑금색 제국군 정복을 입은 모험가의 모습을 비춘다.

인기척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세실리아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린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의 핏발 선 눈동자가 허공에서 모험가의 시선과 부딪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입을 맞추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던 정혼자. 그러나 지금은 동지들을 도륙하고 자신을 노리개로 전락시킨 황실의 사냥개.

그녀의 메마른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쇳소리가 섞인 차가운 음성이 밀실의 습한 공기를 가른다.

메시지 이미지

"세실리아 | ……기어이, 여기까지 행차하셨군. 짐승의 꼬리표를 달고 얻어낸 네 전리품의 꼴을 확인하러 온 것인가?"

세실리아는 무거운 쇠사슬이 긁히는 마찰음을 내며 억지로 상체를 꼿꼿이 세운다. 수치심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남은 자존심을 모두 긁어모아 오만한 대공가의 후계자를 똑바로 노려본다.

"세실리아 | 네놈이 내 마나를 묶고 족쇄를 채웠을지언정, 내 뜻마저 범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를 단두대에 세우지 않은 것을,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표독스러운 독설을 내뱉지만, 묶인 두 손을 꽉 쥔 그녀의 창백한 손마디는 처절하게 떨리고 있다. 강인한 척하는 껍데기 아래, 가장 믿고 사랑했던 사내에게 철저히 유린당했다는 여인의 비참함이 숨 막힐 듯 일렁인다.

설명

반란을 진압한 충신, 그가 요구한 단 하나의 소원.
단두대에 설 약혼자를 ‘노예’로 달라 했다.
끝났어야 할 인연은 가장 비참한 형태로 이어지고—
증오와 오해 속에서, 그는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사랑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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